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르완다 내전 (문단 편집) === 피해 세력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6px -10px" [[파일:1668692534892.jpg|width=100%]]}}} || || 길가에 널부러져 있는 피해자들의 시신 || 르완다 학살은 불과 100일 동안 약 50~80만 명이 학살당하는 사태로 발전했다. 이들 중 84%가 투치족,[* 당시 투치족 중 무려 '''70%'''가 내전 당시에 살해되었다.] 15%는 학살에 동조하지 않은 후투족들이었으며,[* 이들은 '배신자'로 간주되어 '''가장 먼저 살해되었다.'''] 나머지 1%는 트와족이었다. 게다가 부모를 잃은 [[고아]]들은 무려 40만 명이나 생겼고, [[난민]]들은 무려 2백만 명에 달했는데, 이들은 대부분 후투족이었다. 심지어 르완다 내전 기간 동안 영유아 사망률은 무려 '''1000명당 341명'''이었으며, 심지어 이 전쟁으로 인해 르완다인의 평균수명은 단 1년 만에 1993년의 42.2세에서 1994년의 '''14.1세'''로,[* 참고로 중세 영국에서 [[흑사병]]이 창궐할 당시 영국인의 평균 수명이 17세 정도였으며, [[킬링필드]] 당시 캄보디아의 평균 수명이 14.5세였다. 르완다 내전이 어느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는지 알 수 있는 셈.] 즉 단 1년 만에 이전의 '''3분의 1 수준으로''' 떨어졌고, 비슷한 기간 동안 르완다의 1인당 GDP도 249.4달러에서 111.94달러로 이전의 '''절반 미만으로''' 추락했다.[* 이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1년 만에 1인당 GDP가 519.24달러에서 227.23달러로 추락한 셈이다.][* 물론 이는 단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일시적 변동이라 1995년에 르완다의 평균 수명과 1인당 GDP는 각각 39.97세/227.46달러(2023년 환율로는 449달러)로 어느 정도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.] 그리고 르완다의 인구도 내전 1년 전인 1993년에 790.5만 명이었던 것이 내전이 일어난 1994년에는 568.7만 명으로, 내전 1년 후인 1995년에도 568.7만 명을 기록하여 단 2년 만에 당시 인구의 '''28%(!!)'''에 달하는 221.8만 명이 줄었다. 학살 중에는 서양이나 유엔의 외부 조력은 전혀 없었기에 정부 요인들도 대통령 경호대에 의해 암살되었다. 유일하게 살아남은 [[총리]] 포스탱 트와기라뭉구(Faustin Twagiramungu, 1945~)[* 초반에 대통령 경호대에 살해된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의 후임자. 후투족 출신이었으나 본인은 자신을 '르완다인'으로 보았고, 르완다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였던 [[그레구아르 카이반다]](Grégoire Kayibanda, 1924~1976)이기도 했으며, 쥐베날 하뱌리마나에 저항하는 1991년에 공화민주운동(MDR)을 창설하고 지도부로 일하는 등 반독재 운동에도 앞장서기도 했다. 1994년 7월 19일에 총리로 임명되었고, 총리로 일하던 시절에는 투치족에게 어느 정도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었으며, 1995년 8월 28일에 사임한 후 가택연금을 받았으나, 같은 해에 간신히 [[브뤼셀]]로 망명을 간 후 2023년 현재도 브뤼셀에서 생존 중이다. 2003년에는 르완다 대통령 선거에서 [[폴 카가메]]와 격전을 벌여 3.62%의 득표율로 3명 중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. 참고로 이 선거에서 카가메의 득표율이 무려 '''95.05%'''였기에 해외에서는 [[부정선거]] 논란이 있었다.]는 르완다에 주둔 중이던 [[유엔 평화유지군]]에게 보호받아서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. 그러나 이렇게 보호받지 못한 투치족이나 학살에 동조하지 않은 후투족은 당연히 후투족 청년 실업자들이 휘두른 칼과 쏘아댄 총탄에 맞아 죽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